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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꼭 죽어야 한다면, 최소한 의미 있게 죽자. 나는 아스트로파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낼 것이다. 그런 다음 내가 알아낸 답을 지구로 보내겠다. 그런 다음에는… 죽겠지. 이곳에는 고통 없이 자살할 수 있는 길이 아주 많이 있다. 약물 과다 복용에서부터 잠들어 죽을 때까지 산소의 양을 천천히 줄이는 것까지.

그것 참 힘이 나네.

나는 맛있는 ‘4일차, 2식’ 튜브를 먹는다. 소고기 맛인 것 같다. 음식은 점점 덩어리져 간다. 실제로 건더기도 좀 들어 있다. 작게 자른 네모난 당근을 씹는 느낌이 난다. 그동안과는 달리 음식의 질감이 느껴지니 기분이 좋다.

“물 더 줘!” 내가 말한다.

유모 로봇(내가 붙인 이름이다)이 재빨리 플라스틱 컵을 가져가고 물이 가득 찬 다른 컵으로 바꿔준다. 사흘 전만 해도 천장에 달려 있는 저 팔들은 내 꿈에 나올 것만 같은 기계 괴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거기 있는 존재다. 삶의 일부.

알고 보니 숙소는 생각하기 좋은 장소였다. 어쨌든 지금은 시신이 사라진 뒤였으니까. 실험실에는 편하게 긴장을 풀고 있을 만한 장소가 하나도 없다. 통제실에는 멋진 의자가 있지만 공간 자체가 비좁고 사방에서 불빛이 깜빡거린다. 그러나 숙소에는 아주 멋지고 편안한 침대가 있고, 다음에 무슨 일을 할지 생각하며 그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음식도 전부 숙소에서 나온다.

나는 지난 며칠간 아주 많은 것을 기억해 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성공이었던 것 같다. 내가 여기, 다른 항성계에 와 있으니까. 아마 타우세티이겠지. 내가 타우세티를 우리 태양이라고 착각한 것도 말이 된다. 별의 관점에서 봤을 때 타우세티는 태양과 아주 흡사하다. 스펙트럼형도 같고, 색깔도 같고, 등등.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도 알고 있다! ‘있잖아, 세계가 망해간대. 좀 막아 봐.’처럼 애매한 형태로 아는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아스트로파지가 왜 타우세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지 알아내라는 것.

말이 쉽지. 나중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면 좋겠다.

수백만 가지의 질문이 머릿속에 마구 떠오른다. 그중 중요한 질문을 몇 개만 뽑아보면 이렇다.


1. 아스트로파지에 관한 정보를 찾아 항성계 전체를 뒤질 방법은?

2. 대체 난 뭘 해야 하는가? 타우세티에 아스트로파지 연료를 던져 넣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면 되나?

3. 그건 그렇고, 이 우주선은 어떻게 모는 거야?

4. 유용한 정보를 진짜로 찾아낸다면 지구에는 그 정보를 어떻게 알리지? 그럴 때 쓰라고 비틀스가 있는 것이겠지만 비틀스에 자료를 업로드하는 방법은 또 뭐고? 지구 쪽으로 비틀스를 조준하고 발사하는 방법은?

5. 내가,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내가 이 임무에 참여한 이유는 뭘까? 그래, 내가 아스트로파지에 관해 아주 많은 것들을 알아낸 건 사실이었다. 근데 그래서 뭐? 나는 실험실 과학자지, 우주비행사가 아닌걸. 베른헤르 폰 브라운(독일 태생의 미국 로켓 엔지니어‐옮긴이)을 우주로 쏘아보낼 건 아니잖아. 당연히 나보다 적격인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작은 질문부터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일단은 이 우주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이 우주선을 통제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당국은 승조원들을 혼수상태에 빠뜨렸다. 그렇게 하면 우리 정신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딘가에 설명을 마련해 두었을 게 확실하다.

“비행 설명서.”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우주선에 관한 정보는 통제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유모 로봇이 말한다.

“어디서?”

“우주선에 관한 정보는 통제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아니. 통제실 어디에서 볼 수 있느냐고.”

“우주선에 관한 정보는 통제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너 좀 짜증 난다.” 내가 말한다.

나는 통제실로 올라가 모든 화면을 오랫동안 자세히 살펴본다. 각 화면이 무엇을 표시하는지 정리하느라 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여러 기능의 정체가 무엇일지 추측해 본다. 내가 정말로 찾고 있는 것은 ‘정보’라거나 ‘인류를 구하러 오셨나요? 더 알고 싶다면 이 버튼을 누르세요!’ 같은 것들이다.

그런 운은 따라주지 않는다. 몇 시간 동안 이 화면, 저 화면을 찔러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우주선을 다루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승조원들의 뇌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면, 그들을 과학자로 활용하는 건 그다지 쓸모 있는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모든 화면에 계기판을 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서로 바꿔 쓸 수 있을 정도다. 왼쪽 윗부분을 살짝 건드리면 메뉴가 나타난다. 거기에서 뭐든 원하는 계기판을 선택하면 된다.

멋진데. 뭘 볼지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조종석 바로 앞 화면이 가장 크다.

나는 좀 더 촉각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이 버튼 저 버튼 눌러봐야지!

‘우주선 날려버리기’ 버튼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스트라트가 그런 일은 예방해 뒀을 것 같다.

스트라트. 지금 그녀는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마 어느 통제실에 앉아서 교황에게 커피를 타오라고 시키고 있겠지. 스트라트는 정말로 위압적인 사람이었다(과거형으로 쓰면 안 되려나?). 하지만 정말이지, 이 우주선을 현실로 만드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그녀라는 점이 다행스럽다. 내가 이 우주선에 타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스트라트 특유의 세세한 관심과 완벽주의가 사방에 배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아무튼 나는 ‘과학 기기’ 계기판을 주 화면에 띄운다. 내가 앞서 아주 오랫동안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던 바로 그 화면이다. 지금은 타우세티의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 화면. 이 화면의 왼쪽 위에는 ‘태양 관측 망원경’이라는 단어가 떠 있다. 전에는 눈치채지 못 했다. 화면 왼쪽에는 아이콘들이 잔뜩 있다. 아마 다른 장비를 사용할 때 쓰는 아이콘이겠지. 나는 아무 아이콘이나 하나 눌러본다.

타우세티가 사라진다. 왼쪽 윗부분의 글자는 ‘외부 수거함’으로 바뀐다. 화면은 별 특징 없는 직사각형 도면을 보여준다. 여기저기에 각도를 바꾸거나 ‘선미 개방’ 혹은 ‘선수 개방’을 할 수 있는 제어장치가 달려 있다. 좋아. 기억해 놔야지. 이 정보를 가지고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아이콘을 아무거나 눌러본다.

이번에는 글자가 ‘페트로바스코프’로 바뀐다. 그 글자를 제외하면, 검은 화면에 오류 메시지가 떠 있을 뿐이다. ‘스핀 드라이브가 활성화되었을 때는 페트로바스코프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흠.” 내가 말한다.

그래서, 페트로바스코프가 뭔데? 가장 그럴싸한 추측은, 그것이 아스트로파지가 방출하는 적외선만을 특별히 추적하는 망원경이거나 카메라이거나 둘 다라는 것이다. 페트로바 파장을 통해 페트로바선을 찾으니 페트로바스코프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말이지, 모든 단어 앞에 페트로바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짓은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스핀 드라이브가 활성화되었을 때 페트로바스코프를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나는 스핀 드라이브의 작동 방식도, 스핀 드라이브가 스핀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이유도 모른다. 하지만 이 우주선의 뒤쪽에 스핀 드라이브가 달려 있으며, 그것이 아스트로파지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니까 스핀 드라이브는 내 엔진인 셈이다. 아마 스핀 드라이브는 강화 아스트로파지를 활성화해 추진력으로 활용할 것이다.

아… 그 말은, 지금 이 순간 우주선의 뒤쪽에서 말도 안 되는 양의 적외선이 나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 전함 같은 걸 녹여버릴 수 있을 만큼 많이. 확실히 알아보려면 계산을 해봐야겠지만 … 못 참겠다, 당장 계산해 봐야지.

엔진은 초당 6그램의 아스트로파지를 소비한다. 아스트로파지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저장한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스핀 드라이브는 초당 6그램의 질량을 순수 에너지로 바꾸어 뒤쪽으로 뿜어내는 것이다. 뭐,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건 스핀 드라이브가 아니라 아스트로파지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유용한 도구’ 패널을 오른쪽의 작은 화면에 띄운다. 거기에는 당장 쓸 수 있는 익숙한 응용 프로그램들이 잔뜩 있다. 그중 하나가 계산기다. 나는 그 계산기를 사용해 6그램의 질량에너지 변환량을 계산한다. …세상에. 540조 줄이다. 우주선은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매 초 방출하고 있다. 그러니까 540조 와트라는 얘기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에너지다. 태양 표면에서 나오는 에너지보다도 유의미하게 큰 정도다. 그 말 그대로다. 그러니까 … 최대 추진력을 내고 있는 헤일메리의 뒤에 서 있을 때보다 태양 표면에 서 있을 때 받는 에너지가 더 적다는 뜻이다.

지금은 내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 당연히 그렇겠지. 타우세티 항성계에 잠시 머무는 것이 계획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별 반대 방향을 보며 속도를 줄이고 있을 것이다. 여행을 하는 내내 아주 긴 시간을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보낸 끝에 말이다.

좋다. 그러니까 그 모든 빛 에너지는 내가 멀쩡히 지내는 동안에도 타우세티와 나 사이에 있는 먼지 입자와 이온과 다른 모든 것에 부딪힐 것이고, 그 가엾은 입자들은 인정사정없이 증발할 것이다. 그러면 적외선 일부가 다시 우주선 쪽으로 흩어지게 된다. 엔진 출력에 비하면 별것 아닌 양이지만, 페트로바스코프의 시야를 가리기에는 충분하다. 페트로바스코프는 바로 그 진동수의 빛을 소량이라도 찾아내도록 세밀하게 조정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엔진이 켜져 있을 때는 페트로바스코프를 쓸 수 없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타우세티에 페트로바선이 정말로 있는지 알고 싶다.

이론적으로는 아스트로파지에 감염된 모든 별에 페트로바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 조그만 녀석들은 이산화탄소가 있어야만 번식한다. 별에서는 이산화탄소를 얻을 수 없다(별의 핵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말이다. 아스트로파지가 그렇게 높은 온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페트로바선이 보인다면, 타우세티에는 활성화된 아스트로파지 군집이 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군집이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선은 이산화탄소가 있는 행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 행성의 대기에 아스트로파지를 억제하는 다른 화학물질이 있는 건 아닐까? 아스트로파지의 항행 능력을 망가뜨리는 이상한 자기장이 있다거나? 어쩌면 그 행성에는 아스트로파지와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위성이 여러 개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타우세티에는 그냥 대기에 이산화탄소가 있는 행성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망한 것이다. 그건 이 여행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으며 지구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는 뜻이 될 테니까.

생각이야 하루 종일 할 수도 있다. 데이터가 없으면 전부 추정일 뿐이다. 그리고 페트로바스코프가 없으면 데이터를 얻을 수 없다. 최소한, 내가 원하는 데이터는.

나는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관심을 돌린다. 건드려 볼까? 내 말은…. 난 이 우주선을 조종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말이다. 우주선은 그 방법을 알고 있지만 나는 모른다. 엉뚱한 버튼이라도 누르면 나는 우주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상황은 그보다 나쁠 것이다. 나는 타우세티를 향해 (나는 화면의 정보를 확인한다) 초당 7,595킬로미터 속도로 내던져지게 된다. 와! 며칠 전에는 속도가 초속 1만 1,000킬로미터였다. 1.5g로 계속 가속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아니, ‘감속’이라고 해야겠지. 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가속이나 감속이나 그게 그거다. 요점은, 저 별을 기준으로 했을 때 내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화면에는 ‘경로’라고 적힌 버튼이 있다. 이 버튼은 눌러봐도 되겠지? 방금 건 등장인물이 죽기 전에 할 법한 대사인데…. 나는 컴퓨터가 여행을 마칠 때가 됐다고 느낄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버튼을 누른다. 화면이 바뀌어 타우세티 항성계를 보여준다. 그리스어 알파벳 타우로 표시된 타우세티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아아아…. 저게 헤일메리 문양에 있던 소문자 ‘t’였구나. ‘타우세티’의 타우였어. 그러네.

아무튼 네 개의 행성궤도가 타우세티 주위를 도는 가늘고 흰 타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행성 자체의 위치는 오차범위를 포함한 선이 달린 원으로 표시된다. 우리가 태양계 외 행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는 그렇게까지 정확하지 않다. 과학 기구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저 행성들의 위치에 대해서도 훨씬 나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구의 천문학자들보다 12광년이나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노란 선이 화면 바깥에서 시스템 내부로 거의 곧장 들어간다. 그 선은 세 번째와 네 번째 행성 사이 어느 지점에서 항성 쪽으로 방향을 꺾으며 원을 그린다. 네 개의 행성과 아주 멀리 떨어진 그 선에는 노란색 삼각형이 달려 있다. 그 삼각형이 아마 나일 것이다. 노란 선은 내 경로이고. 지도에는 글자도 적혀 있다.


엔진 정지까지 남은 시간: 0005:20:39:06


마지막 숫자가 1초에 하나씩 줄어든다. 좋아, 몇 가지 알아냈다. 첫째, 엔진이 정지되기가지는 약 닷새가 남았다(엿새에 더 가깝다). 둘째, 날짜를 표시하는 칸이 숫자 네 자리로 되어 있다. 그 말은 이 여행에 최소 1,000일이 소요됐다는 뜻이다. 3년이 넘는 시간이다. 뭐, 여기까지 여행하는 데에는 빛도 열두 해가 걸리니, 나한테도 긴 시간이 걸리겠지.

아, 맞네. 상대성.

나는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전혀 모른다. 아니, 내가 얼마나 긴 시간을 경험했는지 모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거의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면 시간 팽창을 경험하게 된다. 지구에서는 내가 지구를 떠난 이후로 경험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상대성이란 이상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시간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지구는 최소 13년을 경험했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지금 당장 아스트로파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 정보가 다시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최소 13년이 걸릴 터였다. 그 말은 지구에서 아스트로파지의 비극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24년간 지속되리라는 뜻이었다. 나로서는 다들 그 비극에 대처할 방법들을 떠올렸길 바랄 뿐이다. 피해라도 줄이든지. 아니, 최소한 26년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헤일메리를 보내지 않았겠지.

어떤 경우든, 이 여행에는 최소 3년이 걸렸다(내 입장에서 3년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게 그래서일까? 그냥 여행하는 동안 깨어 있으면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는 걸까?

나는 얼굴에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질 때에야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우리를 혼수상태에 빠뜨리겠다는 그 결정 때문에 내 친구 둘이 죽었다. 그들은 떠나버렸다. 두 사람과 보낸 순간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상실감은 버티기 어려울 정도다. 머잖아 나도 그들과 함께하게 된다. 집으로 갈 방법은 없다. 나도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과 달리 나는 혼자 죽는다.

나는 눈물을 훔치고 애써 다른 것을 생각한다. 내가 속한 인류라는 종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

지도의 경로를 보면, 우주선은 타우세티를 도는 세 번째 행성과 네 번째 행성 사이의 안정적인 궤도에 자동으로 접어들 모양이었다. 나보고 추측해 보라고 한다면, 그 거리는 대략 1천문단위일 것이다. 태양으로부터 지구까지의 거리. 별과 떨어져 있기에는 꽤 안전한 거리다. 한 바퀴를 완주하는 데 약 1년이 걸리는 느린 궤도. 어쩌면 그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타우세티는 태양보다 크기가 작은 만큼 질량도 작을 테니까. 질량이 작다는 것은 중력이 작고, 주어진 거리를 공전하는 주기가 더 느리다는 뜻이다.

좋다. 엔진이 꺼질 때까지는 닷새가 남아 있었다.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망가뜨리느니 그동안 기다리기로 했다. 일단 엔진이 꺼지고 나면 페트로바스코프를 켜고 저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봐야지. 그때까지는 우주선에 관해 최대한 많이 배워볼 생각이다.

지금 이 순간 야오와 일류키나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일이든 웬만해선 할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그 항공모함에는 인민해방군 간쑤성 해군(People’s Liberation Army Navy Gansu)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왜 해군의 배에 보통 육군에 붙이는 ‘Army’라는 단어를 붙였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배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스트라트의 깡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선원들이 반발했지만, 결국은 그 이름이 사람들 입에 붙어버렸다. 그 배는 절대 육지에 가까이 가지 않고 남중국해를 떠돌아다녔다.

나는 과학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축복받은 한 주를 보냈다.

회의도 없고, 집중력을 흩뜨려 놓는 일도 벌어지지 않고 그저 실험과 공학이 존재할 뿐이었다. 어떤 과제에 심취한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내가 만든 첫 번째 배양기 원형은 또 한 번 성공적인 운영 시범을 보여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대단하지 않았다. 대충 보면 여기저기 못생긴 제어장치가 용접되어 있는, 30피트짜리 금속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배양기는 성공을 거두었다. 한 시간에 겨우 몇 마이크로그램의 아스트로파지밖에 생산하지 못했지만 구상만은 탄탄했다.

내게는 열두 명의 팀원이 있었다. 전 세계에서 데려온 엔지니어들이었다. 그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몽골에서 온 형제였다. 스트라트가 회의실에서 만나자고 호출하기에 나는 그 둘에게 책임을 맡겼다.

스트라트는 회의실에 혼자 있었다. 탁자에는 늘 그랬듯 종이와 도표가 흩어져 있었다. 그래프와 다이어그램이 사방의 모든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어떤 건 새로운 것이고 어떤 건 낡은 것이었다.

스트라트가 긴 탁자의 끝에 앉아 있었다. 예네버르 한 병과 싸구려 유리잔을 든 채였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은 그때 처음 보았다.

“부르셨어요?” 내가 말했다.

스트라트가 눈을 들었다. 눈 밑에 그늘이 져 있었다. 잠을 못 잔 것이다. “네. 앉으세요.”

나는 스트라트 옆 의자에 앉았다. “몰골이 말이 아니시네요. 무슨 일입니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쉽지가 않아서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스트라트는 내게 예네버르를 권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스트라트는 자기 잔에 술을 더 부었다. “헤일메리의 승조원실은 아주 작을 겁니다. 125세제곱미터쯤 될 거예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주선치고는 큰 거 아닌가요?”

스트라트는 앞뒤로 손을 저었다. “소유스나 오리온 같은 캡슐 우주선에 비하면 크죠. 하지만 우주정거장치고는 작은 크기입니다. 국제 우주정거장의 승조원실에 비하면 10분의 1 정도예요.”

“그렇군요.” 내가 말했다. “뭐가 문제입니까?”

“문제는,” 스트라트는 종이가 가득한 서류철을 집어 들더니 내 앞에 내려놓았다. “승조원들이 서로를 죽일 거라는 점입니다.”

“네?” 나는 서류철을 펼쳤다. 안에는 타자기로 작성한 종이가 아주 많이 들어 있었다. 다시 보니, 그것들은 타자기로 작성한 서류를 스캔한 것이었다. 어떤 것은 영어로, 어떤 것은 러시아어로 되어 있었다. “이게 다 뭔가요?”

“우주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때, 소련 사람들이 잠깐 화성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화성으로 사람을 보내면 미국의 달 착륙은 비교적 사소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나는 서류철을 덮었다. 키릴문자는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스트라트는 그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듯했다. 그녀는 무슨 언어가 나오든 늘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트라트는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1970년대의 기술로 화성에 간다는 건 호만궤도(목표한 행성까지 최소한의 연료로 갈 수 있는 비행 궤도‐옮긴이)를 이용한다는 뜻인데, 그 말은 승조원들이 8개월 넘는 시간을 우주선에서 보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소련에서는 몇 달 동안 여러 사람을 비좁고 고립된 환경에 함께 넣어두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실험했어요.”

“그런데요?”

“71일이 지나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매일 주먹다짐을 벌였습니다. 94일째 되는 날에는 실험이 중단됐죠. 실험 대상 중 한 명이 깨진 유리로 다른 사람을 찔러 죽이려 했거든요.”

“그렇군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125세제곱미터의 승조원실에 우주인 세 명을 실어서 4년짜리 여행을 떠나보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걱정된다는 거네요?”

“승조원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승조원은 몇 년 뒤면 죽는다는 걸 알고 여행하게 돼요. 그 짧은 여생 동안 승조원들이 알고 지낼 세상이라고는 우주선 안의 방 몇 개뿐일 테고요. 심리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다들 치명적인 우울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더군요. 자살도 현실적인 위험 요소입니다.”

“네, 그 정도야 심리학을 잘 몰라도 알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뭘 어쩌겠어요?”

스트라트는 스테이플러로 묶인 종이를 집어 내게 쓱 밀어 놓았다. 나는 그 서류를 집어 들고 제목을 읽었다. “장기 혼수에 빠진 영장류 및 인간의 유해 후유증에 관한 연구, 스리수크 외 지음.”

“네. 이게 뭔가요?”

“태국에 있는, 어느 망한 회사에서 했던 연구예요.” 스트라트는 진이 담긴 유리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 회사에서 했던 생각은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암 환자들을 혼수상태로 유도하겠다는 거였죠. 암이 차도를 보일 때 환자들을 깨우겠다는 겁니다. 아니면 더는 치료가 불가능해서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야 할 때라든지요. 어느 경우든, 환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뛰어넘게 되겠지요.”

“그거… 정말 훌륭한 아이디어 같네요.” 내가 말했다.

스트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훌륭한 아이디어가 됐을 겁니다. 그렇게 위험하지만 않았으면요. 알고 보니 인간의 신체는 오랜 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는 데 걸맞지 않았던 거예요. 항암 치료는 몇 달이나 계속되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추가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회사에서는 영장류를 의학적으로 유도한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는데, 영장류들은 혼수상태에서 죽거나 뇌가 곤죽이 된 채로 깨어났어요.”

“그럼 우린 왜 이 얘기를 하는 건가요?”

“추가적인 연구가 진행됐으니까요. 추가 연구에는 역사상 발견된, 인간 혼수 환자에 관한 데이터가 활용됐습니다. 연구자들은 비교적 손상을 덜 입고 장기적인 혼수상태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을 살펴보고,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을 발견했어요.”

오래된 러시아 항공우주국의 서류는 내게 수수께끼나 다름없었지만, 과학 논문은 오랜 세월 나의 강점이었다. 나는 서류를 넘겨보며 연구 결과를 훑어보았다. “표지 유전자인가요?” 내가 말했다.

“네.” 스트라트가 말했다. “연구자들은 인간에게 ‘코마 저항력’을 부여하는 일련의 유전자를 발견했어요. ‘코마 저항력’이라는 건 연구자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문제의 염기 순서는 과학자들이 정크 DNA(유전자 기능이 없는 DNA‐옮긴이)라고 생각했던 DNA 안에 있었어요. 아마 아주 오래전,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우리가 진화시킨 특징일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도 어떤 사람들의 유전암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거죠.”

“이 유전자가 코마 저항력의 원인이라는 건 확실합니까?” 내가 말했다. “상관관계는 있을지 몰라도 인과성이 있을까요?”

“네, 연구자들 의견으로는 확실히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이 유전자는 하급 영장류에게서도 발견돼요. 뭔지는 모르지만, 진화 계보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는 유전자인 겁니다. 동면을 하던 조상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지 모른다는 추정도 있어요. 아무튼 연구자들은 그 유전자를 가진 영장류를 상대로 실험을 했습니다. 그 영장류들은 아무런 부작용 없이, 장기간의 혼수상태에서 살아남았어요. 전부 다.”

“알겠어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네요.” 나는 논문을 내려놓았다. “모든 지원자들에게 DNA 검사를 실시한 다음, 혼수 저항력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만 쓰겠다는 거죠. 여행하는 동안에는 승조원들을 혼수에 빠뜨리고요. 그 사람들은 4년 동안 서로 신경을 긁거나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성찰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스트라트는 내게 잔을 들어 보였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승조원들을 혼수상태에 빠뜨리면 음식 공급이 훨씬 쉬워져요. 영양상 균형 잡힌 식사를 분말 형태로 보관하다가 죽으로 만들어 승조원들의 위 속으로 직접 펌프질해 넣는 거죠. 다양한 식사를 수천 킬로그램이나 준비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분말과 자급형 물 재생 시설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미소 지었다. “꿈같은 얘기네요,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가사상태 같은. 근데 왜 스트레스를 받고 술을 마시는 겁니까?”

“한두 가지 걸리는 점이 있어요.” 스트라트가 말했다. “첫째, 우리는 혼수 환자를 돌봐줄 완전히 자동화된 환자 추적 관찰 및 처치 시스템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 시스템이 망가지면 전원 사망이에요. 활력 징후를 관찰하면서 적당한 약을 링거로 주사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자들을 물리적으로 움직여주고 씻겨줘야 해요. 욕창을 관리하고, 링거나 탐침이 들어간 다양한 부위의 염증이나 감염 같은 2차적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뭐 그런 거죠.”

“네, 하지만 전 세계 의료계가 힘을 합치면 해줄 수 있는 일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스트라트 씨 특유의 마법을 써서 그 사람들한테 이래라저래라 해보세요.”

스트라트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게 주된 문제가 아니에요. 가장 큰 문제는 이겁니다. 그 유전자 염기 서열을 가진 인간은 평균적으로 7,000명 중에 한 명 뿐이에요.”

나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대단한데요.”

“네. 우린 가장 뛰어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보낼 수가 없을 거예요. 가장 뛰어난 자격을 갖춘 사람 중 7,000분의 1을 보내게 되겠죠.”

“평균적으로는 가장 뛰어난 자격을 갖춘 사람 중 1만 4,000분의 1이겠죠. 보통 남자를 뽑으니까요.” 내가 말했다.

스트라트가 눈알을 굴려댔다.

“그렇더라도,” 내가 말했다. “세계 인구의 7,000분의 1은 100만 명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세요. 적임자를 찾을 때 후보군이 100만 명이라는 얘깁니다. 그중에 세 명만 고르면 돼요.”

“여섯 명이죠.” 스트라트가 말했다. “주 승조원과 예비 승조원이 필요하니까요. 발사 전날에 누가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인다든가 하는 이유로 임무를 실패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네, 그럼 여섯 명이요.”

“네. 우주비행사가 될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여섯 명 필요한 거예요. 타우세티의 아스트로파지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아내는 데 필요한 과학적 기술을 가지고 있고, 기꺼이 자살 임무에 참여할 사람이 말입니다.”

“100만 명 중에서 고르는 거잖아요.” 내가 말했다. “100만 명이요.”

스트라트는 조용해지더니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최고의 후보자들을 골랐는데 그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지 모르는 상황 아니면 그보다 한 급 못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자동으로 보살펴 줄, 아직 개발되지 않은 의학 기술에 운을 걸어봐야 하는 상황인 거네요.”

“그런 셈이죠. 어느 쪽이든 위험이 너무 큽니다. 여태 내려야 했던 결정 중에서 가장 힘든 결정이에요.”

“그럼, 이미 결정하셨으니 다행이네요.” 내가 말했다.

스트라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

“당연하잖아요.” 내가 말했다. “스트라트 씨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요. 누가 그 답을 확인해 주길 바랄 뿐이죠. 승조원들을 깨워두면, 정신증적 위험에 대해서 조치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동화된 혼수 병상 기술을 완벽하게 다듬을 시간은 4년이 남아 있어요.”

스트라트는 나를 쏘아보았지만,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좀 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승조원들에게 죽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4년 동안 감정적인 고통까지 겪어달라는 요청은 하지 말아야죠. 과학적으로 보나 도덕적으로 보나 같은 답이 나와요. 스트라트 씨도 알잖아요.”

스트라트는 거의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남은 술을 모두 털어 넣었다. “좋습니다. 박사님은 그만 가보세요.” 스트라트는 노트북 컴퓨터를 끌어다가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말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스트라트에게도, 내게도 각자 할 일이 있었다.



이제는 기억이 더 매끄럽게 떠오른다. 아직 모든 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더는 떠오르는 기억이 갑작스러운 깨달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아, 맞아. 나 그거 아는데.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하는 식이다.

내가 혼수 저항력이 있다는 사람 중 한 명인가 보다. 그러면 이곳으로 파견되었어야 마땅한, 훨씬 더 뛰어난 자격을 갖춘 후보자들 대신 내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가 설명된다.

하지만 야오와 일류키냐에게도 그 유전자가 있었을 텐데, 그 둘은 살아남지 못했다. 내 생각에는 의사 로봇이 완벽하지 않았던 것 같다. 둘에게는 의사 로봇이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의학적 상황이 발생한 게 틀림없다.

나는 둘에 관한 기억을 떨쳐버린다.

이후의 며칠은 인내심 있게 연습을 하며 보낸다. 두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우주선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나는 실험실에 있는 물건을 전부 정리해 장부로 만든다.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물건 중에는 가운데 탁자의 서랍에 들어 있던 터치스크린 컴퓨터가 있다. 정말이지 환상적인 발견이다. 연구와 관련된 화면이 아주 많이 들어 있으니 말이다. 통제실의 패널들과는 다르다. 그 패널들은 전부 우주선이나 우주선의 도구에 관련된 것이니까.

수학과 과학 앱도 여러 개 보인다. 대부분은 내게도 익숙한 기성품이다. 하지만 가장 요긴한 것은 도서관이다!

이 패널은 말 그대로 역사상 작성된 적이 있는 모든 과학 교과서, 모든 주제에 관해 간행된 모든 과학 논문, 그 외에도 아주 많은 것들을 띄울 수 있는 것 같다. ‘의회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폴더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미국에서 저작권을 인정받은 모든 전자 카탈로그가 통째로 들어 있는 듯하다. 불행히도 헤일메리호에 관한 책은 없다.

참고용 설명서들도 있다. 아주 많이. 데이터에 데이터가 쌓여 있고, 그 사이에 또 데이터가 있다. SSD는 무게가 가벼우니, 정보를 실을 때 굳이 인색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자료를 그냥 롬(ROM)에 구워버린 걸 수도 있다.

유용할 것 같지 않은 것들에 대한 참고 자료도 있었다. 하지만 뭐, 건강한 염소의 평균 항문 온도를 알아야만 하는 경우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된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다(그 온도는 화씨 103.4도/섭씨 39.7도다)!

패널을 가지고 놀다 보니 다음 발견이 뒤따랐다. 비틀스를 활용해 지구에 보고할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비틀스를 써야 한다는 건 원래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내용도 안다. 우주선에 실린 엄청나게 큰 데이터 저장 공간에 더해, 패널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외장 드라이브가 탑재되어 있다. 외장 드라이브의 이름은 각기 존, 폴, 조지, 링고다. 그 외장 드라이브 각각에 5테라바이트의 빈 공간이 들어 있다. 그게 비틀스의 데이터라는 걸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 때가 됐을 때 비틀스를 출발시키는 방법은? 그걸 알아보려고 나는 통제실로 향한다.

발사 명령을 찾으려면 비틀스 패널의 UI를 몇 겹이나 뚫고 들어가야 하지만, 나는 찾아내고 만다. 내가 알아낸 대로라면, 그것은 ‘발사’라는 이름이 붙은 버튼일 뿐이다. 비틀스는 별에 기반해 스스로 방향을 잡고 지구로 향하는 모양이다. 헤일메리호도 여기까지 오는 데 같은 기술을 썼으니 비틀스도 방법을 알고 있을 터다. 경로를 선택할 때 인간이 하는 실수를 개입시킬 이유는 없다.

통제실에 있는 동안 과학 기구 화면을 여기저기 눌러본다. 처음의 창 몇 개는 태양망원경, 페트로바스코프 그리고 가시광선과 적외선을 포함한 몇 가지 대역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이다.

나는 가시광선 망원경을 가지고 논다. 꽤 재미있다. 나는 별들을 살펴본다. 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가 있는 곳에서는 타우세티의 행성들조차 그냥 작은 점으로만 보인다. 그래도 나의 꽉 막힌 작은 세상에서 바깥을 내다본다는 건 멋진 일이다.

선외활동에만 쓰는 전용 화면도 발견했다. 내 예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EVA 우주복(선외활동 전용 우주복‐옮긴이) 제어장치가 잔뜩 달려, 통제실의 요원이 선외활동 도중 우주복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관리할 수 있다. 게다가 우주선 선체에는 복잡한 연결 장치가 달려 있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끈이 연결된 고리가 오갈 수 있는 레일이 여러 개 달려 있는 셈이다. 선외활동이 중요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아마 타우세티의 아스트로파지를 수집하라는 거겠지.

아스트로파지가 있다면 말이지만.

타우세티에 페트로바선이 있다면 수집할 만한 아스트로파지가 있는 셈이다. 그중 일부를 채취하는 것이 1단계가 될 터다. 그걸 실험실로 가져가서 지구의 아스트로파지와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곳의 아스트로파지는 위험성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다음 나흘은 기본적으로 내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걱정하는 시간이다. 아,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다. 그래도 그냥 걱정하는 것이다.

나는 통제실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1분, 1초가 째깍째깍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넌 무중력상태에 들어가게 될 거야.” 내가 말한다. “추락하지는 않겠지. 위험하지도 않을 거고. 우주선의 가속이 멈추겠지만, 괜찮아.”

나는 롤러코스터나 워터슬라이드를 싫어한다. 갑자기 떨어지는 그 감각을 생각하면 간이 떨어질 만큼 겁이 난다. 그런데 몇 초 후면 나는 바로 그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경험해 온 ‘중력’이 완전히 멈출 테니까.

초시계가 돌아간다. “4… 3… 2….”

“간다.” 내가 말했다.

“1… 0.”

예정에 딱 맞춰 엔진이 꺼진다. 내가 그동안 내내 느껴오던 1.5g의 중력가속도가 사라진다. 중력은 사라졌다.

나는 공포에 질린다. 정신적으로 아무리 준비해 봐야 소용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공황에 빠진다.

비명을 지르고 팔다리를 휘저어댄다. 억지로 몸을 말아 태아 자세를 취한다. 편안한 자세이기도 하고, 제어장치나 화면을 건드리는 일도 막아준다.

나는 통제실을 둥둥 떠다니며 몸을 부들부들 떤다. 의자에 몸을 묶어놨어야 하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바보.

“나는, 떨어지는 게, 아니야!” 나는 비명을 지른다. “추락하지 않는다고! 여긴 그냥 우주니까! 다 괜찮아!”

안 괜찮다. 배 속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은 기분이다. 토할 것 같다. 무중력상태에서 토한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내겐 비닐 봉투가 없다. 이런 상황에 심하다 싶을 만큼 대비하지 못했다. 그냥 말로 나 자신을 타일러서 원초적인 공포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멍청했다.

나는 작업복의 옷깃을 열고 그 아래로 고개를 집어넣는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췄다. 나는 ‘9일차, 3식’ 전체를 셔츠에 토한다. 그 다음에는 옷깃을 가슴에 바짝 대고 있다. 역겹지만 통제는 된다. 토사물이 통제실 전체를 떠다니게 놔두고 질식할 위험에 처하는 것보다는 낫다.

“아, 세상에….” 나는 울먹인다. “이럴 수가… 이건….”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이 시점부터 나는 완전히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걸까? 내가 무중력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인류가 사멸하는 건가?

아니.

나는 이를 악문다. 두 주먹을 꽉 쥔다. 엉덩이에도 힘을 준다. 힘 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온몸의 모든 부위에 힘을 준다. 그러자 내게 통제력이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뭔가 하고 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긴 시간이 지나고 나자 공포가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두뇌란 놀라운 존재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다. 나는 적응하는 중이다.

두려움이 조금 가시자 선순환이 일어난다. 이제 나는 덜 두려워질 것이다. 그 사실을 알자 두려움이 더욱 빨리 가라앉는다. 머잖아 공황은 스러져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흩어져 일반적인 불안이 된다.

나는 통제실을 둘러보지만 멀쩡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아래쪽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다. 배 속이 여전히 토할 것처럼 불편하다. 다시 토할 경우에 대비해 옷깃을 그러쥐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나는 구토를 참아낸다.

뜨뜻한 토사물이 내 가슴팍과 작업복 사이에서 철벅거리는 느낌이 역겹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나는 실험실로 내려가는 해치 쪽으로 방향을 잡고, 뒤쪽 격벽을 찬다. 아래쪽으로 떠내려가 실험실로 들어간다. 실험실 전체가 아무렇게나 떠다니는 잔해로 어수선하다. 물건 목록을 만드느라 실험대 위에 꺼내놓았던 것들이다. 그 모든 게 멋대로 떠다니며, 생명 유지 장치의 환기구에서 나오는 기류를 따라 퍼지고 있다.

“바보.”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예상했어야 하는데.

계속 침실로 나아간다. 놀랍지도 않지만 그곳에도 사방에 잡동사니가 떠다니고 있다. 나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려고 비품실 통 대부분을 열어두었다. 그 탓에 통들과 그 내용물까지 이리저리 떠다닌다.

“씻어 줘!” 내가 로봇 팔에게 말한다.

로봇 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직접 옷을 벗고, 작업복을 사용해 몸에서 더러운 것을 닦아낸다. 나는 며칠 전 스펀지 목욕 구역을 찾아냈다. 그래봐야 벽에서 스펀지가 나오는 싱크대일 뿐이지만. 샤워실을 만들 공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걸로 몸을 닦는다.

역겨운 오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세탁?” 내가 말한다.

로봇 팔이 내려와 더러운 작업복을 내 손에서 받아간다. 천장의 판이 열리더니 로봇 팔이 작업복을 그 안 어딘가에 집어넣는다. 저기가 다 차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떠다니는 잡동사니 사이에서 갈아입을 작업복을 찾아 입는다. 무중력상태에서 옷을 입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중력이 있을 때보다 더 어렵다고는 못하겠지만, 다르다. 나는 새 작업복을 입는 데 성공한다. 약간 꽉 낀다. 이름표를 확인한다. ‘姚’라고 적혀 있다. 야오의 작업복이다. 뭐, 그렇게까지 꽉 끼지는 않는다. 내 작업복을 찾겠다고 침실을 하루 종일 이리저리 튀어 오르며 다니고 싶은 생각도 없고. 정리는 나중에 해야겠다.

지금은 저 밖에 뭐가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에 너무 흥분된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바로 다른 항성계를 탐험하는 최초의 인간인데! 내가 여기에 왔는데!

바닥을 차고 해치 쪽으로 가다가… 빗나간다. 나는 천장을 들이받는다. 최소한 늦기 전에 두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할 수는 있었다. 천장에서 튀어나와 다시 바닥으로 간다.

“어어.” 나는 웅얼거린다. 다시, 이번에는 좀 더 천천히 해본다. 성공한다. 실험실을 지나 통제실까지 올라간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은 확실히 중력이 없을 때 훨씬 더 쉽다. 지금도 메스꺼운 느낌이 들지만 이것만은 인정해야겠다. 이건 꽤 재미있다.

내비게이션 화면에는 ‘주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는 글자가 떠 있다. 스핀 드라이브 화면에는 ‘추진력: 0’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페트로바스코프 화면에 ‘준비 완료’라는 글자가 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손을 비빈 다음 화면으로 손을 뻗는다. 인터페이스는 충분히 단순하다. 구석에 있는 아이콘은 ‘육안’과 ‘페트로바’라는 두 상태를 오갈 수 있는 토글 스위치다. 현재는 ‘육안’으로 맞춰져 있다. 화면의 나머지 부분은 우주선에서 본 가시광선 풍경을 보여준다. 일반 카메라 같다. 나는 화면을 찔러보고, 내가 카메라를 상하좌우로 돌리거나 화면을 확대 혹은 축소하고 회전시키는 등의 다양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린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멀리 떨어진 행성들뿐이다. 타우세티가 보일 때까지 카메라를 돌려야 할 것 같다. 나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왼쪽, 왼쪽, 왼쪽으로 민다 …. 별이 어디에 있는지 대강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할 때 쓸 만한 기준점이 없다. 화면을 왼쪽으로 몇 번 밀 때마다 아래쪽으로 한 번씩 민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모든 각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마침내 타우세티를 찾아내지만, 타우세티의 모습은 예상과 다르다.

며칠 전 태양망원경으로 본 타우세티는 여느 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타우세티는 주변에 아지랑이 같은 고리가 둘러진 단단한 검은색 원이다. 나는 그 이유를 즉시 알아차린다.

페트로바스코프는 상당히 민감한 장치다. 페트로바 대역의 빛이 아주 조금만 있어도 발견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조정되어 있다. 항성은 모든 파장의 빛을 그야말로 가당찮을 만큼 많이 뿜어낸다. 이건 쌍안경으로 태양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페트로바스코프는 태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 센서와 별 사이를 언제나 갈라놓는, 물리적인 금속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판의 뒷면을 보고 있는 셈이다.

괜찮은 설계다.

나는 토글 스위치 쪽으로 손을 뻗는다. 이게 관건이다. 이곳에 페트로바선이 없다면, 나는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뭔가 생각해 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길을 잃은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되겠지.

나는 토글 스위치를 누른다.

별이 사라진다. 타우세티를 둘러싼 아지랑이 고리는 남는다. 그야 예상했던 일이다. 저 고리는 항성의 코로나로서 충분한 빛을 방출한다. 그러니 그 빛의 일부는 페트로바 진동수를 띠는 게 당연하다.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영상을 살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지만, 다음 순간 눈에 들어온다. 타우세티의 왼쪽 아랫부분에서 나오는, 아름답고 검붉은 호선.

나는 손뼉을 친다. “좋았어!”

그 모양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 페트로바선이다! 타우세티에 페트로바선이 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꿈틀거리며 춤을 춘다. 무중력상태에서는 쉽지 않지만 최선을 다한다. 이젠 나아갈 길이 생겼다!

해야 할 실험이 아주 많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페트로바선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확인해야겠지. 분명 저 선은 행성 중 한 곳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과연 어떤 행성일까? 그 행성의 흥미로운 점은 무엇일까? 그러고 나서는 그 지역 아스트로파지의 견본을 채취해, 그 아스트로파지가 지구의 아스트로파지와 같은지 봐야 한다. 페트로바선으로 직접 날아가 EVA 우주복을 입고 우주선 선체에 붙은 먼지를 긁어내면 될 것이다.

하고 싶은 실험 목록만 작성하면서 일주일을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화면이 잠깐 번쩍하는 것을 본다. 빛이 빠르게, 잠깐 반짝였을 뿐이다.

“저게 뭐지?” 내가 말한다. “다른 단서인가?”

번쩍임이 다시 일어난다. 나는 카메라를 움직이고, 우주의 그 부분을 확대한다. 페트로바선이나 타우세티와는 조금도 가깝지 않은 곳이다. 행성이나 소행성에서 빛이 반사된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빛을 잘 반사하는 소행성이 있어서, 내가 페트로바스코프를 통해 볼 수 있을 정도로 타우세티의 빛을 튕겨내는 것이다. 단, 빛이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하는 걸 보면 회전하는 불규칙한 형태의 물체일 테고….

번쩍이던 빛이 단단한 광원이 된다. 이제는 그냥… ‘켜져’ 있다. 계속.

나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무슨…. 지금 이게 무슨….”

광원이 점점 밝아진다. 즉시 밝아진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밝아진다. 나는 1분 동안 그 빛을 바라본다. 이제는 더 빠르게 밝아지는 듯하다.

내 쪽으로 다가오는 물체인가?

가설이 즉각적으로 머릿속에서 튀어나온다. 어쩌면 아스트로파지가 다른 아스트로파지에게 이끌리는 것 아닐까? 아스트로파지의 일부가 내 엔진에서 나오는 빛을 본 것이다. 그 빛은 녀석들이 사용하는 파장과 같은 파장을 띠고 있었을 테고. 그래서 아스트로파지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아스트로파지는 이런 방식으로 이동 중인 커다란 아스트로파지 군집을 찾아내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저건, 내가 자신들을 이산화탄소가 있는 행성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 쪽으로 다가오는 아스트로파지 덩어리가 아닐까?

흥미로운 가설이었다.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었지만.

지속적인 빛이 점점 더 밝아지고, 밝아지고, 밝아지다가 결국 사라진다.

“어라.” 내가 말한다. 몇 분을 기다려도, 빛은 돌아오지 않는다.

“흠….” 이런 이례적인 상황을 기억해 둔다. 하지만 당장은 저 현상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정체가 뭐였든 간에 그 빛은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까.

다시 페트로바선으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선이 어느 행성으로 이어지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우주선을 조종하는 방법을 먼저 알아내야 할 것 같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어려운 과제다.

나는 페트로바선을 보려고 카메라를 다시 돌린다. 뭔가 잘못됐다. 페트로바선의 절반이 그냥… 사라졌다.

페트로바선은 몇 분 전에 그랬듯 타우세티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으나, 전혀 특이할 게 없어 보이는 우주의 한 공간에서 갑자기 멈추었다.

“무슨 일이지?”

내가 아스트로파지의 이동 패턴을 교란한 걸까?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헤일메리가 우리 태양계에서 이동하고 있을 때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채지 않았을까?

나는 선이 끊기는 지점을 확대한다. 그냥 직선이다. 누가 커터 칼로 페트로바선을 싹둑 잘라, 잘린 부분을 내다버린 것만 같다.

아스트로파지가 이동하며 그리는 거대한 선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그보다 단순한 설명이 있다. 카메라 렌즈에 뭔가 묻었다는 것이다. 어떤 잔해가 남긴 얼룩. 지나치게 흥분을 잘하는 아스트로파지 무리일지도 몰랐다. 그런 거면 좋겠는데. 바로 살펴볼 샘플이 생기는 거잖아!

육안 카메라를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더 잘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토글 스위치를 누른다.

바로 그때, 그 모습이 보인다.

페트로바선을 가리고 있는 물체가 있다. 내 우주선 바로 옆이었다. 어쩌면 몇백 미터쯤 떨어진 곳일지도 모르겠다. 대충 삼각형이고, 선체 전체에 박공처럼 돌출된 부분이 있다.

그래. 선체라고 했다. 저건 소행성이 아니다. 선이 너무 매끄럽고 너무 곧다. 이 물체는 누군가가 만든 것이다. 제작한 것. 건조한 것. 저런 형태는 자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저건 우주선이다.

다른 우주선.

이 항성계에 나 말고도 다른 우주선이 있다. 번쩍이는 빛은 그 엔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 우주선도 아스트로파지를 동력으로 사용한다. 헤일메리와 똑같다. 하지만 그 디자인은, 그 형태는 내가 여태껏 본 어떤 우주선과도 다르다. 선체 전체가 거대하고 납작한 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압력 용기를 만드는 최악의 방법이다. 제정신인 사람이 우주선을 저런 모양으로 만들 리는 없다.

제정신인 지구인이라면 말이다.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몇 차례 눈을 깜빡인다. 침을 꿀꺽 삼킨다.

저건…. 저건 외계의 우주선이다. 외계인이, 우주선을 만들 정도의 지능이 있는 외계인들이 만든.

인류는 우주에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방금 우리의 이웃을 만났다.

“이런 씨발!”